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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이틀째. 올레길 6코스


오전 9시. 아직도 여인숙

이 미친 모기들! 새벽까지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치다가 이 여름에 이불을 몽땅 뒤집어쓰고 잠을 청했다. 그러면 모기에게 한방이라도 덜 물릴 테니깐. 근데 정작 이불을 뒤집어쓰니 너무 덥더라. 당장 아래층으로 내려가 주인에게 말을 하고 모기약을 얻어왔다. 처음부터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모기약을 얻어온 시간은 새벽 4시. 아.. 7시에 모닝콜 들어올 텐데.

어김없이 7시에 모닝콜이 왔고 정신없이 전화를 받다가 다시 잤다. 8시 30분쯤에 일어나서 대강 짐 정리와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나갈 준비도 마쳤다. 아침 먹고 쇠소깍으로 이동해야지. 날씨가 좋지 않아 걱정이다.

올레길을 가다 이뻐서 찍어본 풍경



오후 12시 5분. 소정방 폭포

올레 6코스를 걷기 시작한 지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칼 호텔 주변을 걷고 있다가 경치도 좋고 사람도 유난히 많은 곳을 봤다. 뭔가 하니 낙차가 4~5m정도 되어 보이는 작은 폭포에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더라. 구경을 하며 사진을 찍는데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청년도 들어가 보라고 하셔서, 나시와 신발을 벗고 나도 폭포에 몸을 던졌다. 물살이 어찌나 세고 차갑던지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이끼 때문에 바닥은 미끈거리고 폭포수는 계속 떨어지니 그 안에서 이동하기조차 힘이 들더라. 그래도 얼음장 같은 시원함은 참 상쾌했다.

참 좋았던 소정방 폭포



폭포 옆에서 이걸 적고 있다가 아까 올레길에서 만났던 초록색 티를 입은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오늘의 목적지를 물어보니 나와 같다. 그래도 동행하진 않을 거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쉬다가 다시 출발해야겠다.


오후 1시 40분. 천지연 폭포 근방

소정방 폭포에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끼고 다시 길을 떠났다. 바로 근처에 있는 정방 폭포도 가보려 했으나 그곳은 입장료를 받기에 그냥 지나쳐왔다. 길바닥에 떨어진 폴라포라는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보고 엄청 먹고 싶었는데 정방 폭포 매표소 근처 매점에서 폴라포를 팔길래 하나 사먹었다. 길을 걸으며 폴라포에 있는 얼음을 씹어먹는 기쁨이란. 800원짜리 폴라포로 8,000원 이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계속 길을 걷다가 비디오 아티스트 이중섭의 생가도 봤고 해군부대도 봤다. 해군부대 담벼락 쪽으로 예쁘장한 여자 둘이 지나가는데 군인들이 엄청난 환호를 하더라. 역시 군인이란.

정방 폭포는 패스했으니 천지연 폭포는 꼭 가보고 싶었다. 근데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 정신을 차리니 이미 천지연 폭포 입구를 0.7km나 지나와 버렸다. 아. 다시 돌아가서 천지연 폭포를 갈까 하다가 근처 벤치에 앉아 이 글을 적고 있다.

이건 가치의 문제다. 0.7km를 되돌아갈 정도로 천지연 폭포가 볼거리가 있을까? 가만히 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지금 천지연 폭포를 가지 않으면 분명히 나중에 후회할 거다. 그 커다란 폭포가 보여주는 자연의 위대함, 웅장함, 거대함이란 상상만 해도 즐겁다.

하지만, 가진 않을 거다. 그냥 상상만으로 그려보고 끝낼 거다. 제주도에 왔다고 꼭 천지연 폭포에 들려야 하는 건 아니니깐.

10분도 넘게 쉬었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다시 길을 떠나자


오후 2시 5분. 방금 그 자리

걷기 시작하자마자 왠지 천지연 폭포가 가고 싶어졌다. 그 방향으로 가는 차를 얻어 타면 어떨까 싶어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해봤다. 번호판에 '허'가 붙은 렌트카와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 아줌마가 탄 차, 용달차에까지 손을 들어 봤지만 모두 실패. 빈 택시는 꽤 다녔지만, 자존심상 택시는 타기 싫더라. 10분여 히치하이킹에 도전을 해보고 포기를 했다. 분명히 인심이 야박한 건 아닐 거다. 내가 지금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가 거지꼴이라 그러리라. 수염도 덥수룩하고 아까 폭포에서 물놀이한 탓에 머리도 산발인 내 모습은 내가 봐도 깜짝깜짝 놀랄 정도다. 나도 좀 멀끔히 하고 다녀야 하려나?


오후 2시 35분. 천지연 폭포 앞

다시 용기를 내어 히치하이킹을 시작했고 세 번 만에 차를 잡아타는데 성공했다. 내 나이 또래의 두 청년이 몰던 차였는데, 집으로 들어가고 있던 길이라고 하더라. 원래 가던 방향과는 좀 다른 방향 같아 보이긴 했는데도, 흔쾌히 나를 천지연 폭포 매표소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쏘렌토를 타던 그 청년들 고마워!

웅장한 천지연 폭포



힘들게 도착한 천지연 폭포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단체로 온 중고딩이 많아서 너무 시끌시끌하더라. 폭포 그 자체도 별로였다. 기념사진을 찍어두긴 했는데 지켜보는 게 전부인 천지연 폭포보다는 직접 들어가서 놀 수 있는 소정방 폭포가 더 마음에 든다.

하도 시끌시끌하니 어여 자리를 피해야겠다. 천지연 폭포는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생각보다 별로인 폭포로.


오후 7시 8분. 여관이지만 이름은 모텔인 곳

제주도에 올레길이 유행인가보다. 걷는 사람도 참 많고 제주도에서도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이 보인다. 이제 코스 하나를 돌았을 뿐인데 혹여 누군가 물어본다면 6번 코스의 마지막 부분은 정말 비추천을 할 거다. 6번코스의 시작부분에는 올레길의 이정표가 참 많았다. 10~15m에 하나씩은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코스 후반부로 갈수록 이정표의 성의는 없어진다. 천지연 폭포를 지난 이후부터는 50~100m에 하나씩의 이정표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갈림길에서조차 아무런 이정표가 없어서 이 길 저 길 모두 직접 100~200m정도 가봐야 한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는지. 코스의 막판엔 아예 이정표가 없어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방향을 잡아갔다. 으..

이정표가 없어서 짜증도 나고 목도 말라서 수퍼에 들어갔다. 길도 물어보고 물도 얻어 마시고 폴라포도 하나 샀다.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가 덤으로 고구마도 주시더라. 3시부터 제주도에 비가 내려 계속 비를 맞고 다녔는데, 비를 맞으며 왼손엔 고구마 몇 덩이를, 오른손엔 폴라포를 들고 생전 처음 와보는 길을 걷는 기분이란! 히히

그러나 이 좋은 기분도 얼마 못 갔다. 난 이정표를 따라서 산을 탔는데 점점 이정표가 사라지더니 어느 순간엔 이정표가 보이질 않더라. 한 달 동안 할 욕을 이 산에서 다 한 거 같다. 이 산의 이름은 '삼매봉'이다. 정상에 가니 아주 작게 올레길의 이정표를 찾을 수 있었고 욕은 조금 잠잠해졌다. 반대방향으로 산을 내려와 오늘의 목적지인 '찻집 솔빛바다' 에 도착을 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삼매봉의 정상까지 올라갔다 내려온 사람은 나뿐이 없더라. 으.. 비도 엄청 맞았는데..

외돌개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내려왔다. 근처에 게스트하우스는 근처에 없고 옷도 빨고 따뜻한 물에 샤워도 해야 했기에 여관을 잡았다. 3만원 달라는 여관비를 2만 7천원에 흥정을 했고 방에 들어와 짐을 풀고 빨래도 하고 온수샤워도 했다.

나가서 회를 먹을까 싶었는데 이상하게 간짜장과 탕수육이 땡겨서 시켜먹었다. 이과두주도 같이 시키는 건 당연지사! 아 좋다.


* 오늘 총 사용한 금액
컵라면 1,000원
삼각김밥 700원
코카콜라 900원
초코바 500원
쇠소깍행 택시비 5,800원
폴라포 x 2 1,600원
천지연 폭포 입장료 2,000원
버스비 950원
여관비 27,000원
간짜장과 탕수육과 이과두주 20,000원
총 60,450원
오늘까지 총 89,45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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